페르난도 데 로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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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난도 데 로하스는 1470년경 스페인 톨레도 인근에서 태어나 1541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작가이자 법학자이다. 그는 살라망카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대표작인 《라 셀레스티나》는 1499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드라마, 극시, 소설 등 다양한 장르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로하스 생전에 큰 성공을 거두어 16세기 동안 여러 판본과 속편이 출판되었다. 로하스는 결혼 후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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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데 로하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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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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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페르난도 데 로하스 |
출생 | c. 1465/73년경 |
출생지 | 라 푸에블라 데 몬탈반, 톨레도 주, 스페인 |
사망 | 1541년 4월 |
사망지 |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 톨레도, 스페인 |
국적 | 스페인 |
모교 | 살라망카 대학교 |
직업 | 작가, 극작가, 변호사 |
배우자 | 레오노르 알바레스 데 몬탈반 |
자녀 | 7명 |
경력 | |
직책 |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 시장, 1530년대 |
알려진 작품 | 《라 셀레스티나》 (1499) |
2. 생애
페르난도 데 로하스는 1470년경 스페인 톨레도 근처의 라 푸에블라 데 몬탈반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콘베르소) 가문에서 태어났다.[2] 그는 살라망카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1498년경 졸업했다.[4] 대학 시절 그는 대표작 ''라 셀레스티나''를 쓰기 시작하여 1499년에 출판했다.[4] 이는 그가 남긴 유일한 문학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6]
대학 졸업 후 1507년경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로 이주하여 변호사로 활동했다.[4] 1508년경, 그는 역시 콘베르소 가문 출신인 레오노르 알바레스 데 몬탈반과 결혼하여 네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4] 그는 1530년대에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의 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4] 로하스는 1541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 1. 출생과 가문
페르난도 데 로하스는 1470년경 스페인 중부 톨레도 근처의 작은 마을인 라 푸에블라 데 몬탈반에서 유대인 혈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 집안이었다. 동시대 문서들은 로하스를 "콘베르소"라고 언급하는데, 학자들은 그가 직접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콘베르소 혈통' 출신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나뉜다.[2]유대인 혈통이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로하스의 가족은 적어도 3대 동안 이달고로 인정받는 등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2] 하지만 당시 콘베르소 가족들은 종교재판의 지속적인 감시 아래 있었으며, 비밀리에 유대교를 믿는다는 의심과 비난에 쉽게 노출되었다.[3]
2. 2. 학업 및 작품 활동
페르난도 데 로하스는 살라망카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1498년경 졸업했다.[4] 대학 시절 그는 다양한 서적을 접했는데, 이는 훗날 그의 대표작 라 셀레스티나를 저술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대학 재학 중 집필을 시작하여 1499년에 ''라 셀레스티나''(원제: ''Tragicomedia de Calisto y Melibea|es'')를 출판했다.[4] 이 작품은 드라마, 극시, 대화 소설,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로 묘사되어 왔으며[5], 로하스 생전에는 무대에 오르지 못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대체로 희곡으로 간주한다.[5] 작품은 외설적이면서도 희극적인 세부 묘사가 풍부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지만,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끝맺는다. 학계에서는 이 작품을 중세 스페인 문학의 마지막을 장식하거나 르네상스 시대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한다.[4]
''라 셀레스티나''는 로하스가 남긴 유일한 문학 또는 드라마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6] 작가 키스 그레고르는 이 작품이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음에도 "그의 유일한 문학적 유언"이라고 평가했다.[6]
한편, 작품의 1장과 나중에 추가된 5장의 문체 차이 때문에 작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는 로하스가 각 부분을 다른 시기에 집필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즉, 젊은 시절 첫 장을 쓰고 이후 문학적 소양이 성숙해진 뒤 나머지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특히 작자 미상으로 되어 있는 가장 긴 분량의 1장은 가톨릭 교리에 다소 반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로하스가 종교재판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숨겼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로하스 생전에 ''라 셀레스티나''는 큰 성공을 거두어 16세기 동안 약 60개의 판본과 6개의 속편이 출판되었다.[7] 작품의 성적인 묘사나 비관주의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종교 재판은 반성직자적인 구절을 삭제하는 것으로 만족했다.[7]
2. 3. 결혼과 사회 활동
살라망카 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로하스는 고향 라 푸에블라 데 몬탈반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집에서 잠시 생활했다. 이 시기 친척들이 종교재판의 조사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나, 로하스 자신이 유대교 신앙 문제로 의심받은 적은 없었다.[2]당시 많은 콘베르소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독교 가문과 결혼하는 경향이 있었지만,[2] 로하스는 또 다른 콘베르소 가문 출신인 Leonor Álvarez de Montalbán|레오노르 알바레스 데 몬탈반spa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네 아들과 세 딸이 태어났다.[4]
로하스는 1507년경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로 이주하여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4] 1508년경 레오노르 알바레스 데 몬탈반과 결혼했다.[4] 1525년, 그의 장인 Álvaro de Montalbán|알바로 데 몬탈반spa이 비밀리에 유대교를 믿는다는 혐의로 종교 재판에 회부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종교 재판소는 로하스가 콘베르소라는 이유로 장인의 변호를 맡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는 로하스 본인이 유대교를 믿는다는 의혹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신분 자체에 따른 제약이었다.[2] 그럼에도 로하스는 장인을 위해 증언할 수 있었고, 알바로 데 몬탈반에 대한 혐의는 결국 기각되었다.[2]
이후 로하스는 1530년대에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의 시장을 역임하며 지역 사회에서 활동했다.[4]
3. 《라 셀레스티나》의 작가 논란
''라 셀레스티나''의 1장과 나중에 추가된 5장 사이에 나타나는 문체 차이 때문에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실제 작가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로하스가 각 장을 서로 다른 시기에 썼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즉, 젊은 시절에 첫 장을 집필하고, 이후 문학적, 예술적 소양이 성숙해지면서 나머지 15장과 후반부 5장을 추가했다는 설명이다. 특히 작자 미상으로 알려진 1장은 분량이 가장 길고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이 부분에는 가톨릭 교리에 다소 반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로하스가 종교재판의 위협을 피하고자 의도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된다.
4. 《라 셀레스티나》의 성공과 영향
로하스가 살아있는 동안 ''라 셀레스티나''는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다.[7] 16세기 동안 약 60개의 판본과 6개의 속편이 출판되었다.[7] 작품의 성적인 노골성과 비도덕적인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종교 재판은 반성직자적인 구절만을 삭제하는 데 그쳤다.[7]
참조
[1]
웹사이트
Fernando de Rojas {{!}} Spanish writer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3-28
[2]
논문
Fernando de Rojas, converso and hidalgo
https://www.jstor.or[...]
1947-07-00
[3]
논문
Fernando de Rojas, Converso
https://www.jstor.or[...]
1968-03-00
[4]
간행물
Rojas, Fernando de
http://go.galegroup.[...]
Gale Virtual Reference Library
[5]
논문
Fernando de Rojas
https://www.jstor.or[...]
1977-04-00
[6]
서적
Rojas, Fernando de
http://www.oxfordref[...]
Oxford University Press
2003-00-00
[7]
서적
Rojas, Fernando de
http://www.oxfordref[...]
Oxford University Press
20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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